궁지에 몰린 상대가 휴전을 제안할 때, 악수를 청하는 것은 하수다. 진정한 승부사는 상대의 턱을 노린다. 이란이 파키스탄을 통해 미국에 전달했다는 ‘선 종전, 후 핵협상’ 카드는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미국의 해상 봉쇄와 경제적 압박에 질식하고 있다는 비명에 가깝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다시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과 함께 전쟁은 끝난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개방하고 미국은 해상 봉쇄를 해제한다.”
이 문장을 보라. 핵심은 ‘핵’이 아니라 ‘해상 봉쇄 해제’와 ‘호르무즈 해협 개방’이다. 이는 이란 정권의 생명줄인 석유 수출길을 터달라는 애원이다. 핵 프로그램 동결이라는 본질적인 양보 카드는 제재 완화라는 ‘보상’을 받은 뒤에나 만지작거리겠다는 속셈이다. 먼저 돈부터 받고, 일은 나중에 생각해보겠다는 심산 아닌가. 신뢰가 없는 거래에서 선불을 요구하는 자는 사기꾼일 확률이 높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 제안을 “만족스럽지 않다”며 단칼에 거절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는 단순히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이 아니다.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전략이 마침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상대가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손을 풀어줄 이유가 무엇인가?
냉전 시대의 데자뷰
이 상황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소련을 상대로 펼쳤던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소련은 군비 경쟁에 허덕이며 경제가 파탄 나기 직전이었다. 그들이 군축 협상 테이블에 나왔을 때, 레이건은 압박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스타워즈’ 계획(전략방위구상)으로 소련을 더욱 구석으로 몰아붙여 체제 자체의 붕괴를 앞당겼다. 트럼프는 지금 이란을 상대로 21세기판 레이건의 각본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적당한 합의’가 아니라 이란의 ‘완전한 굴복’이다.
미국과 이란이 생각하는 협상의 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 이란의 구상: 단계적 접근. 우선 경제적 숨통을 트고(호르무즈 개방, 봉쇄 해제), 시간을 벌면서 핵 능력이라는 핵심 자산의 가치를 극대화하려 한다.
- 미국의 구상: 일괄 타결. 핵, 미사일 프로그램 등 모든 위협 요소를 한 번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되돌릴 수 없는 항복 문서를 받아내려 한다.
이란의 제안은 이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가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인내심을 시험하고 글로벌 유가 불안정을 무기로 동맹국들을 흔들려는 전술적 움직임일 뿐이다. 백악관이 “대통령의 레드라인은 매우 분명하다”고 선을 그은 것은, 이러한 전술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지 표명이다.
결국 이 지루한 힘겨루기의 끝은 외교관의 펜 끝이 아니라, 어느 한쪽의 경제가 먼저 무너지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트럼프는 이란의 경제적 붕괴에 베팅했고, 이란의 ‘평화 제안’은 그 베팅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간 성적표와 같다. 세계 경제는 또다시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살얼음판 위를 걷게 되겠지만, 강대국들의 체스판에서 변방의 희생은 언제나 상수였다. 협상은 결렬된 것이 아니다.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