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광장에 울려 퍼진 ‘기후 신문고’의 북소리는 절박한 외침이 아니라, 거대한 예산 잔치를 예고하는 팡파르에 가깝다. 지방선거라는 정치적 대목을 앞두고, ‘기후 대응’이라는 고결한 명분 아래 벌어질 세금 재분배의 서막을 알리는 소리다.
오늘(29일) 그린피스가 서울시청 앞에서 벌인 퍼포먼스는 표면적으로 기후 위기를 외면하는 제도를 비판하고 서울시장 후보들에게 더 강력한 예산 편성을 촉구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는 경제 논리가 실종된 채 선의와 상징만으로 가득 찬 ‘녹색 포퓰리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들은 더 많은 ‘기후 대응 예산’을 요구하지만, 정작 그 예산이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그 효율성은 어떻게 담보할 것인지에 대한 냉철한 고찰은 보이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은 예산의 ‘규모’가 아니라 ‘효율성’이다. 이미 ‘녹색’이라는 딱지만 붙으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는 예산 항목들이 넘쳐난다. 이는 마치 1930년대 미국의 뉴딜 정책이 대공황 극복이라는 대의 아래 수많은 비효율적 토목 사업, 이른바 ‘포크배럴(Pork-barrel)’을 양산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특정 지역구의 상원의원을 위한 댐과 다리가 건설되었듯, 지금은 ‘기후’라는 이름 아래 특정 단체와 산업을 위한 보조금과 지원 사업이 정당화되고 있다.
‘녹색 예산’이라는 이름의 백지수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서울시의 예산 집행이 기후 위기를 ‘가속’시키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타당한가? 오히려 진짜 문제는, 선언적 목표만 있고 구체적인 성과 측정 지표가 없는 ‘녹색 사업’에 막대한 세금이 낭비되는 현실이 아닐까. 시민의 분노와 절박함을 담보로 요구하는 것은 결국 더 큰 규모의 ‘백지수표’일 뿐이다.
- 성과 측정의 부재: 도심에 자전거 도로 하나를 더 짓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탄소 감축 효과를 가져오는가? 누구도 정확히 답하지 못한다. 그저 ‘친환경적’이라는 상징만 남을 뿐이다.
- 정치적 유인: 정치인들은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조형물이나 단기 지원금처럼 표심을 자극하는 사업에 예산을 투입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 민간 혁신의 위축: 정부가 비효율적인 녹색 기술과 사업에 보조금을 퍼부을수록, 시장 원리에 따라 성장해야 할 진정한 혁신 기업들은 오히려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정부의 ‘선택’이 시장의 ‘효율’을 구축(驅逐)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싶다면, 예산의 양을 늘려달라고 북을 칠 것이 아니라, 탄소 배출에 명확한 ‘가격’을 매기는 시장 기반의 해법을 요구해야 했다. 선한 의도에 보조금을 줄 것이 아니라, 나쁜 결과에 비용을 부과하라.
이것이 경제학의 기본 원리다. 탄소세와 같은 제도는 모든 경제 주체가 스스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탄소를 줄이도록 유도한다. 관료가 임의로 돈을 나눠주는 방식보다 훨씬 투명하고 효과적이다.
시청 앞의 신문고는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다가오는 선거에서 ‘녹색 예산’이라는 새로운 이권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지를 묻는 정치적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공(鑼) 소리다. 그 북소리를 듣고 달려올 후보들이 과연 지구의 미래를 걱정할까, 아니면 자신의 표밭에 뿌려질 달콤한 예산을 먼저 떠올릴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