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또다시 부동산 시장의 만성적 불안에 ‘공급 확대’라는 이름의 진통제를 꺼내 들었다. 올 상반기 수도권에 1만 3400호, 작년 대비 43% 증가한 물량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하지만, 이 숫자의 마취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의문이다. 화려한 수치 뒤에 가려진 정책의 속살은 냉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예년 대비 수도권 내 많은 분양이 예정돼 있어 국민들의 체감도가 높아질 것”
국토부 관계자의 장밋빛 전망은 공허하게 들린다. ‘체감도’라는 단어만큼 정치적으로 편리한 말도 없다. 1만 3400호라는 숫자는 분명 작년 9400호보다는 많다. 그러나 수십만 명에 달하는 청약 대기자와 매년 수도권에서 형성되는 신규 가구 수를 감안하면 이는 거대한 저수지에 물 한 컵을 붓는 격이다. 고양창릉, 남양주왕숙 등 3기 신도시 물량이 드디어 풀린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이는 오래전부터 약속된 물량이 이제야 겨우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뿐, 새로운 해법이 아니다.
껍데기만 남은 ‘공공분양’의 약속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가격이다. 분양가를 ‘인근 시세의 90% 내외’에서 책정하겠다는 방침은 ‘공공주택’이라는 이름 자체를 무색하게 만든다. 이미 천정부지로 솟은 시세를 기준으로 삼는 순간, 서민을 위한 주거 사다리는 그 의미를 잃는다. 10억짜리 아파트를 9억에 분양하는 것이 과연 공공의 역할인가? 이는 무주택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 약간의 자금 여력이 있는 중산층에게 던져주는 ‘로또 청약’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잊었다.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는 집값 폭등을 잡기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이라는 파격적인 계획을 밀어붙였다. 비록 졸속 건설과 기반 시설 부족이라는 부작용을 낳았지만, 시장의 공급 부족 심리를 단번에 꺾어버리는 ‘충격 요법’으로서의 효과는 분명했다. 당시 정책은 물량의 절대적 규모로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지금의 정책은 어떤가?
- 찔끔찔끔 공급: 시장의 기대를 꺾기엔 턱없이 부족한 물량.
- 지연되는 인프라: 남양주왕숙의 9호선 연장선, 인천계양의 교통망 등은 입주 후 한참 뒤에나 완성될 ‘미래의 약속’이다. 입주민들은 또다시 교통지옥을 감수해야 한다.
- 무늬만 공공: 시세에 연동된 분양가는 주거 안정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자산 증식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정부는 ‘속도감 있는 추진’을 외치지만, 시장이 느끼는 것은 속도감이 아니라 피로감이다. 교통과 교육 등 정주여건이 우수하다
는 홍보 문구는 이제 식상하다 못해 공허하다. 초등학교 부지가 계획되어 있고, 역세권이 될 것이라는 희망만으로 수억 원의 빚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 공급 대책은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회피한 채, 급한 불만 끄려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시장은 진통제가 아니라 수술을 원한다. 부동산 정책의 목표가 소수의 청약 당첨자에게 시세차익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면, 공급의 양과 질, 그리고 가격 책정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시장에 던져진 1만 3400호라는 숫자는 절망적인 현실을 가리기 위한 착시 효과일 뿐이다.